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세상의 끝에 서보니, 마음이 시작되었다

by 준미니 2025. 5. 17.

오늘은 해남 송지면 땅끝마을에서 시작된 조용한 성찰 여행에 대해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의 끝에 서보니, 마음이 시작되었다
세상의 끝에 서보니, 마음이 시작되었다

땅끝으로 향하는 길, 마음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해남이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을 때, 그저 ‘남쪽 끝’이라는 이미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끝’이라는 단어가 마음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뭔가 하나를 내려놓고 싶을 때, 멈춰 서고 싶을 때, 사람은 ‘끝’이라는 지점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내려다 보면, 해남 송지면 땅끝마을은 지도상으로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점입니다. 그러나 그 작고 고요한 점을 향해 가는 길은 오히려 무언가 커다란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가는 길은 길고도 조용했습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다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마지막에는 택시를 탔습니다. 도시의 소음이 멀어질수록 마음도 함께 정리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땅끝마을은 생각보다 더 단출했습니다.

관광지의 번쩍이는 화려함은 없었고, 조용히 파도를 끌어안고 있는 바다와 낮게 드리운 구름, 그리고 세월의 때가 묻은 간판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풍경을 보자마자, 머리 속이 텅 비어졌습니다. 바로 그게 필요했던 것 같았습니다.

 

땅끝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나의 풍경


땅끝마을에는 ‘땅끝전망대’라는 이름의 작은 전망대가 있습니다. 바람에 쓸린 해송과 흙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전망대에 서면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날씨가 맑을 땐 제주도 성산일출봉이 보인다고도 하는데, 제가 방문한 날은 안개가 살짝 껴 있어서 수평선이 몽환적으로 번져 있었습니다.

그 풍경 앞에서 오래도록 말을 잃었습니다. 평소에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을 제가, 그날은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그 순간만큼은, 기록보다 ‘기억’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사실 어떤 새로운 시작점일 수도 있다는 것.
사람들이 이곳까지 오는 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자신만의 감정과 기억, 그리고 방향을 다시 정리하고 싶어서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저 역시도 그 풍경 앞에서,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무언가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성과, 인간관계, 미래에 대한 불안들. 그런 감정들이 더 이상 제 안에서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땅끝에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작은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땅끝에서 시작되는 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끝’이라는 말과 ‘시작’이라는 말이 동시에 쓰인 그 문장을 보며,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끝에 서 있다고 느낄 때, 실은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점이라는 것. 우리는 너무 자주, 멀어졌다고 느끼는 것을 ‘끝’이라고 단정짓지만, 사실 그 끝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시작될 수 있다는 진리를 잊곤 합니다.

해남 송지면의 땅끝마을은 아주 조용하고 단순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사람은 자신에게 더 가까워집니다.
마을 어귀의 작은 카페에서 마신 따뜻한 커피 한 잔, 주인아주머니의 소박한 인사, 파도 소리 속에 묻혀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 모든 것이 거창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저는 이상하게도 가벼웠습니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버틸 수 있다’는 믿음 하나가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해남에서 얻은 건 답이 아니라, 질문을 마주할 용기였던 것 같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한 그곳에서, 나는 나를 처음부터 다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해남 땅끝마을은 그렇게 조용한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언제든 지치고 멈추고 싶을 때, 다시 찾아가도 좋을 ‘마음의 시작점’.
그것이 제가 만난 땅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