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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붉은 마음, 꽃잎처럼 흘렀다

by 준미니 2025. 5. 29.

고창 선운사, 동백이 지는 절벽 아래 
전라북도 고창, 봄이 오면 세상이 붉어진다.
선운사로 가는 길목, 하늘을 찌를 듯 곧은 나무 끝에 붉은 동백이 고요히 피어난다.
그리고 그 꽃잎이 무성한 침묵처럼 하나둘 떨어질 때, 이곳은 단지 ‘꽃이 예쁜 절’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가 깃든 마음의 공간이 된다.한 송이 붉은 마음, 꽃잎처럼 흘렀다

 

한 송이 붉은 마음, 꽃잎처럼 흘렀다
한 송이 붉은 마음, 꽃잎처럼 흘렀다

 

동백꽃, 고요한 절의 붉은 울림


고창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때(서기 577년) 검단 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산자락에 포근히 안긴 이 절은 그 자체로 고요하고 단정하지만, 봄이 오면 그 풍경은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다.
동백꽃이 절벽 아래로 쏟아지는 그 계절이 되면, 이 고찰은 다시 살아난다.

선운사 경내에는 수령 수백 년의 동백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동백나무들은 사계절 내내 무심하게 푸르지만, 이른 봄이면 피고, 또 지는 속도로 생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동백은 꽃잎이 한 장씩 흩날리지 않고, 통째로 떨어진다. 그래서 더욱 선명하고, 더욱 강렬하다.

동백이 지는 소리 없는 순간,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한 송이 붉은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건 어쩌면 누군가가 묵묵히 참고 살아낸 시간일 수도 있고, 말을 아낀 채 떠나간 이의 흔적일 수도 있다.

선운사의 동백은 그렇게 보는 이의 마음마다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가슴에 쌓인 슬픔을 건드리는 이도 있고, 잊고 지냈던 생의 의지를 떠올리는 이도 있다.

그래서 선운사의 봄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라, 감정이 피고 지는 시기다.
꽃이 떨어지는 그 순간조차도 아름답다는 걸 배우게 되는 계절.

 

구도자의 길, 산사에 깃든 수행의 흔적


선운사는 단순한 관광지나 꽃놀이 명소가 아니다. 이곳은 지금도 실제로 수행이 이루어지는 산사(山寺)이며, 그 깊은 숲과 바위, 계곡에는 구도자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절 주변에는 선운산 도립공원이 펼쳐져 있고, 거대한 암벽과 긴 오솔길은 수행자들의 길이자 방문자에게는 사색의 공간이 된다.
동백꽃이 피는 봄에도, 겨울의 찬 기운이 남아 있을 때에도, 이 절은 늘 한 걸음 느리게 걷는 법을 알려준다.

대웅전 앞 석탑은 조용히 세월을 견디고 있고, 동백이 흩날리는 돌계단 위에서는 종종 스님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그 고요한 정적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게 된다.

여기서 ‘꽃’은 단순히 자연이 아니다.
꽃이 지는 모양, 꽃이 떨어진 자리에 남는 자취, 꽃 위로 지나가는 바람—모든 것이 선문답처럼 마음을 건드린다.

실제로 선운사에는 수행을 위해 입산한 많은 이들이 머물며, 일상의 고통이나 고민에서 벗어나 삶을 다시 성찰한다.
꽃놀이로 들렀던 방문객들 중 일부는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절벽 아래 바위에 조용히 앉아 머문다.
그건 구도의 시작일 수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첫 고요일 수도 있다.


스러짐의 미학, 봄이라는 시간 속에


동백은 ‘스러짐’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꽃이다.
누군가는 “죽음을 닮았다”고도 말하고, 누군가는 “지더라도 고결한 꽃”이라 말한다.
선운사의 동백은 특히 더 그렇다.
피고 진 자리에 사람들의 기억이 쌓이고, 감정의 잔상이 남는다.

봄의 절정에 선운사를 찾으면, 마치 붉은 비를 맞은 듯 길 위에 꽃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그 위를 조심스레 걷는다. 꽃을 밟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무언가 신성한 것을 지나가는 듯한 경외심 때문이기도 하다.

선운사의 봄은 시끄럽지 않다.
벚꽃길처럼 활짝 웃는 풍경도 아니고, 유채밭처럼 환한 생동감도 없다.
대신 이곳은 ‘조용한 감동’을 안긴다.
눈부신 색깔보다, 마음을 오래 울리는 붉은 침묵.

그래서 많은 시인들과 예술가들이 선운사의 동백을 노래했다.
시인 최영미는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그 사람을 떠올렸다”고 했고,
화가들은 ‘동백이 진 자리’를 물감 대신 기억으로 담았다.

이 절은, 이 봄은, 그래서 모두에게 ‘자신만의 사연’을 꺼내게 하는 힘을 가진다.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이별을, 또 다른 누군가는 부모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동백꽃처럼 흩날릴 때,
이 절은 다시 봄이 된다.

 

피고 지는 것들의 순한 고백
선운사에서의 봄은 단지 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한순간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고요한 절집, 붉은 꽃잎, 절벽 아래 길 위의 침묵—모든 요소가 감정과 기억을 흔들어 놓는다.

“한 송이 붉은 마음, 꽃잎처럼 흘렀다.”
그 문장이 의미하는 건, 아마도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의 감정이 잠시 피었다가, 조용히 스러지는 순간들일 것이다.

선운사를 떠날 때 사람들은 말없이 돌아선다.
마치 어떤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오래 품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그리고 그 마음 위로 동백 한 송이가 조용히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