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독일마을, 망향과 귀향 사이 기억의 파편이 지붕 위에 앉았다
경남 남해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 주황색 지붕의 이국적인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겉모습은 독일이지만, 그 속에는 낯익은 한국의 정서와 아픈 근대사가 녹아 있다.
이곳은 독일로 떠났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돌아와 지은 마을, 그리움과 환영이 교차하는 ‘기억의 장소’다.
파독의 역사, 낯선 땅에 뿌리 내린 한국인들
1960년대 대한민국은 전쟁의 상처로 가난과 실업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그 무렵 정부는 서독과의 협약을 통해 많은 한국인을 독일로 파견했다. 그들은 ‘경제개발을 위한 해외 노동력 수출’이라는 이름 아래, 생계를 책임지고 나라에 외화를 들여올 사명을 안고 낯선 유럽 땅으로 향했다.
독일에 파견된 한국인은 약 2만여 명에 이른다. 그중 상당수는 광산에서 일한 광부였고, 또 다른 한 축은 병원에서 일한 간호사였다. 이들은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독일 사회에서 육체적 노동과 차별, 외로움을 견디며 삶을 일궈 나갔다. 독일의 차가운 지하 광산과 병원의 밤 근무 속에서도 이들의 가슴속엔 늘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했다.
그들은 조국에 매달 송금을 보내 가족을 먹여 살렸고, 나라의 외화 보유고에 크게 기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독일을 방문해 이들을 치하했을 만큼, 그들의 존재는 국가 경제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삶은 늘 고단했고 외로웠다.
몇몇은 독일에 정착했지만, 상당수는 퇴직 후 한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귀향한 이들에게 한국은 더 이상 익숙하지 않은 땅이었다. “독일에서는 외국인이었고, 한국에선 독일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이들의 말은, 망향과 귀향 사이에 선 정체성의 혼란을 말해준다.
남해에 피어난 작은 독일, 그리움이 만든 마을
2001년, 경남 남해군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한 귀향 정착마을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곳이 바로 ‘남해 독일마을’이다. 이 마을은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독일식 목조 주택과 주황색 지붕, 하얀 벽이 특징이다.
독일에서 살다 돌아온 이주민들이 직접 독일에서 자재를 공수하거나, 독일풍 건축을 적용해 자신들의 기억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이 마을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삶의 흔적이 응축된 장소다.
지붕 위에는 독일에서의 추억이 얹혀 있고, 창문 너머에는 한국 바다의 풍경이 스민다. 마을을 걷다 보면 간혹 독일어가 들려오고, 골목골목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나 작은 정원이 시간과 국경을 넘나드는 감정을 자극한다.
이 마을의 집 한 채 한 채에는 이름 없는 개인의 고단한 이력이 깃들어 있으며, 이것이 마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마을 한쪽에는 ‘파독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실제 물품, 사진,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어, 그 시대의 생생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전시관에서 만난 한 간호사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독일의 병원에서 밤을 새우며 환자 곁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내가 돌보고 싶었던 건,
아버지와 어머니, 고향의 이웃이었지요.”
이처럼 남해 독일마을은 아픈 기억을 품은 땅이지만, 동시에 돌아온 자들의 터전이자 화해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 ‘관광지’가 아닌 ‘기억지’
오늘날 남해 독일마을은 SNS 속 인기 여행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국적인 풍경과 감성적인 사진이 넘쳐나는 장소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카페를 찾는다. 그러나 이 마을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 화려한 이미지 너머에 있는 삶과 역사를 봐야 한다.
이곳은 단지 포토존이 아니다.
지붕 위에 앉은 주황색 기억들, 골목 끝에 스며든 외국어의 잔향,
그리고 나지막이 들려오는 “그때는 말이야…”라는 할머니의 목소리.
남해 독일마을은 살아 있는 증언의 공간이다.
마을에서 실제로 거주 중인 분들은 지금도 이 마을을 지키며 살아간다.
관광객이 북적이는 날이면 그분들은 때론 반갑고, 때론 조용히 스쳐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이 어떻게 ‘풍경’이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한 간호사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독일로 갔지만, 독일이 우리 삶이 되진 않았어요.
이제야 진짜 집에 돌아온 것 같아요.
다만… 그 사이, 너무 많은 것이 변했지요.”
그래서 이 마을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건 단 하나다.
잠시 멈춰 서서, 누군가의 창가 앞에 놓인 작은 독일 인형이나,
햇살에 빛나는 주황색 지붕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이 마을은 기억과 정체성, 그리움과 시간이 뒤섞인 감정의 지도이며,
그 안에는 수많은 개인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낯선 집 위에 내려앉은 고국의 마음
남해 독일마을은 아름답고 이국적이지만, 그 겉모습만을 보고 지나치기엔 너무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마을은 ‘해외 이주’라는 국가 정책의 상징이자,
낯선 곳에서 가족을 위해 모든 걸 바쳤던 사람들의 인간적 서사가 담긴 공간이다.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는 그 골목에는,
독일의 광산에서 막 퇴근한 광부의 숨결이,
독일 병원 복도에서 긴장을 풀지 못하던 간호사의 손끝이
보이지 않는 잔상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마치 주황색 지붕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듯,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