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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 흐르는 돌계단, 그 끝에 다다르면

by 준미니 2025. 5. 28.

 

해남 대흥사에서 만나는 선비와 고승의 길 사색이 흐르는 돌계단, 그끝에 다다르면 무엇이 있을지

해남 대흥사에 대해서 소개해볼까한다.


남도 해남의 끝자락, 구름이 머무는 산자락 아래 대흥사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단순한 사찰이 아니다. 수많은 고승과 선비가 걸어간 길, 차 한 잔에 담긴 사색, 돌계단에 스민 정신의 무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사색이 흐르는 돌계단, 그 끝에 다다르면
사색이 흐르는 돌계단, 그 끝에 다다르면

 

백두대간 끝자락, 사찰보다 깊은 정신의 터전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두륜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말기 창건되어 천년의 역사를 지닌 사찰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사찰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오랜 연륜 때문만이 아니다. 대흥사는 단순한 불교 수행 공간을 넘어, 유교·불교·차 문화가 융합된 정신 수련의 장이었다.

두륜산은 바위산과 숲, 안개가 어우러진 경승지로 옛 선비들 사이에서도 ‘사색의 산’이라 불릴 만큼 내면의 길을 걷기 좋은 환경이었다. 대흥사는 그러한 두륜산 자락에 안겨 있어, 자연과 수행, 고요함과 배움이 어우러진 정신 공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대흥사는 불교계 뿐 아니라 남도의 선비 문화 중심지로도 기능했다. 특히 이곳은 다산 정약용과의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유배 시절 다산은 대흥사의 승려들과 교류하며 정신적 위안을 받았고, 이후 그의 제자들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즉, 대흥사는 사찰이면서도 ‘선비들이 머무는 곳’이었고, 그것이 바로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인문적 깊이를 지닌 장소로 느껴지게 하는 이유다.

대흥사를 오르는 길에는 돌계단이 길게 이어지는데, 그 길을 걷는 이들은 단지 절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유와 침묵을 향해 발을 디디는 듯하다. 그 돌계단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눈을 감으면, 마치 과거의 선비들이 남긴 숨결이 바람을 타고 건네는 질문이 들려오는 듯하다.

 

차 향기 속 고승의 자취, ‘대흥사 차 문화’


대흥사는 우리나라 불교 사찰 중에서도 차 문화의 성지로 꼽힌다. 이곳의 스님들은 단순히 수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통한 수행과 교류, 즉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정신을 실천해왔다.

특히 초의선사(草衣禪師)는 대흥사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한국 차 문화의 부흥을 이끈 인물이다. 초의선사는 19세기 대흥사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당대 문인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그중에서도 추사 김정희와의 인연은 잘 알려져 있다. 추사는 초의선사의 차를 극찬하며 서간을 주고받았고, 실제로 대흥사를 찾아 머물기도 했다.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 관련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는 단순한 차의 제조법을 넘어, 차를 통한 정신 수련, 인간관계, 자연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이는 대흥사의 차 문화가 단순히 ‘마시는 차’가 아닌, 삶의 태도와 철학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대흥사에서는 차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다도와 명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고, 찻잔을 닦고, 차를 우려내는 그 모든 과정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대흥사 경내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과거 초의선사도 이렇게 차를 마시며 사색을 이어갔을 것이고,
그 찻잔 위에는 산 안개와 마음의 안개가 함께 머물렀을 것이다.

 

사색이 깃든 길, 걷는다는 것의 의미


대흥사를 오르는 길은 그 자체로 걷는 명상의 공간이다. 경내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울창한 나무와 바위, 계곡이 어우러져 있고, 중간중간 작은 암자와 쉼터가 존재한다. 이 길은 그저 도착을 위한 통로가 아니라, 사색과 성찰을 위한 하나의 여정이다.

특히 대흥사 경내에는 표충사, 대웅보전, 천불전 등 조선 후기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공간들이 자리잡고 있다. 표충사에는 서산·사명·기허 삼대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어, 단순한 건축을 넘어 호국불교의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경내에는 선방(禪房)과 정자가 곳곳에 존재해, 사찰을 걷는 이들이 쉬어가며 자연을 마주하고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돌담 너머로 스며드는 바람, 나무 그늘 아래 떨어지는 햇살, 그리고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이 모든 것이 대흥사라는 공간에 정신의 여백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 나와, 마지막 돌계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사람들은 스스로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물리적인 이동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을 향한 발걸음,
삶에서 놓쳤던 ‘생각의 시간’을 다시 시작하는 물음이다.

 

선비의 길, 수행자의 길, 오늘을 걷는 우리의 길
해남 대흥사는 불교사찰이지만, 그 이상이다.
이곳은 조선의 선비와 고승들이 만났던 정신의 장,
차 한 잔 속에 철학이 녹아 있던 공간,
돌계단 위에서 사유가 싹튼 장소다.

관광을 위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조금 더 천천히 걷고, 눈을 감고,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이곳은 단지 ‘보는’ 공간이 아니라, ‘느끼는’ 공간,
그리고 ‘되돌아보는’ 장소라는 것을.

오늘 우리가 대흥사를 걷는다는 건,
어쩌면 그 길을 걸었던 옛 선비와 고승들의 시간을 잠시 빌려,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대흥사의 돌계단 끝에 다다르면,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우리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길을 걷는 동안
우리 안에도 ‘사색’이라는 씨앗이 조용히 심겼을 테니까.